김창동/수필가-유치환의 '바위'
시사통영 | 입력 : 2022/12/15 [17:28]
12월이다. 일 년이 지나갔다. 문득 가슴이 서늘해진다. 마치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다. 삶의 절반이 땡볕에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녹아서 형체도 없어진 시간을 찿아서, 서둘러 일기장을 들여다본다. 아무도 내 시간을 훔쳐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나 대신 그 시간을 사용한 것이 아니기에 불현듯 유치환의 시 '바위'를 소환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유치환의 '바위')
청마 유치환은 시에서 그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라고 했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지금의 위상보다 나은 어떤 사람이 되어 태어나기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다 못해 어떤 짐승으로라도 태어나 지금 사람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나 고뇌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바람도 아닌, 무생물체로서 '한 개 바위가 되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짧은 견문으론 청마 이전 이토록 극단적이며 심각한 의지적 외침을 한 시인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겠다는 것이다. 생명책의 근원적 바람은 주어진 생명의 존속을 되도록 길게, 나아가 다음 생애는 더 상승한 상태의 생명을 부여받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청마는 그 '망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억년의' 세월이 걸리더라도 '정(情)' 전개되는 현장에는 결코 마음 두지 않고 굳게 잎 다물어 '망각'을 향해 '안으로만 채찍질'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흐르는 구름'의 바람직한 여정(旅程)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뇌성 소리의 두근거림과 같은 희망적인 것들을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내 몸(바위)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이렇다저렇다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겠다고 읊고 있다. 애정과 연민 희로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굳은 선언이다. 이 시, '바위' 노래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 유치환이 외치는 것이다.
불교에선 사람을 유정(有情)이라 한다. 유정에는 여섯 갈래가 있다. 가장 무거운 죄업을 짓고 그 업의 보갚음을 심각한 고통으로 받는 지옥(地獄). 남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욕심만 끝없이 채우려다 고통받는 아귀(餓鬼). 끓임없이 남을 괴롭히고 전쟁 일삼는 수라(修羅). 어둡고 무지몽매한 일만 저질러 지혜의 빛 사라져버린 축생(畜生). 좋은 일 나쁜 일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희로애락의 속박을 못 벗는 인간(人間). 긴 수명 큰 복 누리게 되었으나 미망(迷妄) 을 벗지 못하는 천계(天界) 이런 여섯 갈래 생명체가 유정(有情)이다. 이 유정들은 그 생각과 행위와 바람의 갈래, 정도에 따라 여섯 갈래 길을 맴돌게 된다. 이를 육도윤회(六道輪廻) 라 한다. 육도는 고정 고착된 것 아니고 끊임없이 돌고 돈다는 것이다. 유정들은 육도에서 맴도는 것인바 결코 무정물 곧 비정(非情. 풀, 나무 등의 무생물)이 될 수는 없다.
시에서 유치환은 다 버리고 '비정의 함묵' 을 지키기 위해 '한 개의 바위'가 되겠다고 강력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흐르는 구름'이나 '머언 원뢰' 등과 같이 자유롭게 함께하고자 하는 역설의 의지가 무의식중에 작용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알려진 청마는 일제의 압박에 시달려 천신만고를 겪었던 시대에 의지와 항거의 외침을 이렇게 표출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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